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튜브 앨로이스 (문단 편집) === MAUD의 발족 === 1940년 6월에 발족된 MAUD의 명칭은 닐스 보어가 보낸 전보로 명명되었다. MAUD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 [[리버풀 대학교]], [[버밍엄 대학교]], [[브리스톨 대학교]], 총 5군데의 연구기관에서 핵개발 연구를 시작했다. 초창기 기금은 대학에서 조달했으나 9월에 7500£ 상당의 정부 기금이 들어왔고, 미국에서 수 kg의 불화 우라늄를 사들여왔다. 리버풀 대학교는 제임스 채드윅이 연구팀을 이끌었다. 프리슈 외 4명의 과학자들과 브리스톨 대학교의 세실 포웰과 앨런 넌이 리버풀 대학 연구팀에 소속되었다. 리버풀 대학교 연구팀은 프리슈와 파이알스의 연쇄 핵분열 연구를 바탕으로, 열핵분열을 일으켜서 동위원소를 분리해내는 연구를 진행했다. 온도 기울기를 통해 무거운 입자 가스와 가벼운 입자 가스를 분리하여 동위원소를 분리하고자 했다. 그리고, 우라늄 235의 핵과 중성자간 충돌들을 조사해 우라늄 235의 임계지점을 밝히고자 했다. 첫 실험에서는 자연 우라늄을 사용해 결과값이 나오지 않았지만, 1941년 미국 카네기 연구소가 순수 우라늄을 뽑아내는데 성공하여, 채드윅은 실험 기구를 보내어 순수 우라늄의 임계질량을 얻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브래그와 코크로프트가 연구팀을 이끌었고, 6명의 연구원들이 연구에 참여했다. 케임브리지 연구팀은 주로 중수에서의 우라늄 238의 연쇄 반응에 대해 연구했다. 프랑스 침공이 일어나자, 프랑스의 물리학자들이 2만 £가 넘는 중수 샘플을 영국으로 보내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중수로 인해 중성자가 감속되면서 우라늄 238으로 흡수되며 우라늄 239로 반응하는 현상을 관측했다. 게다가 우라늄 238에서 화학적 방법으로 분리된 넵투늄과 플루토늄이 우라늄 235와 마찬가지로 방사성을 충분히 띄고 있어 중성자에 의한 핵분열이 가능하며, 풍부한 우라늄 238을 바탕으로한 핵분열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버밍엄 대학교는 파이알스가 연구팀을 이끌었다. 화학자들을 포함해 4명의 연구팀은 이론적인 문제점과 불화 우라늄에 관해 연구를 진행했다. 옥스퍼드 대학교는 시몬이 연구팀을 이끌었고, 5명의 연구진들이 동위원소의 분리에 관해 연구를 진행했다. 1941년 3월 MAUD는 정책 위원회와 기술 위원회로 분리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